난무하는 여성대학 혐오..."해방과 평등의 공간으로 재의미화 해야"
권김현영 위원 “성차별 저항해온 교육기관으로 인식 변화시켜야”
나임윤경 교수 “여대 간 연대로 경쟁력 확보해야”

여성교육의 산실로 여겨지던 여자대학를 향한 공격이 그 어느 때보다 거세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여대 혐오’로 번지는 상황 속에서 이에 맞서기 위해 여대의 현재적 의미와 정체성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는 전문가들의 제언이 나왔다.
8일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개최된 ‘여성혐오와 여자대학, 그 변화의 시작’ 토론회에서 권김현영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기획연구위원은 “여대를 안전한 공간이 아닌, 가보지 않은 길을 개척해 온 해방과 평등의 공간으로 재의미하는 작업이 여대를 혐오로부터 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대에 대한 공격과 혐오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2010년대 중반 페미니즘 대중화 이후 여대만을 고집하는 여학생들까지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언론들까지 합세해 ‘여대 기피론’과 ‘여대 무용론’을 펼치고 있다. 현재 전국 4년제 여대는 이화·숙명·성신·동덕·덕성·서울·광주여대 등 7곳뿐이다. 한양여대를 비롯한 전문대를 더하면 모두 14곳이다. 상명여대는 1996년 상명대로, 부산여대는 1997년 신라대로 이름을 바꾸며 남녀 공학으로 전환했다. 성심여대는 가톨릭대와, 효성여대는 대구가톨릭대와 통합돼 남녀공학이 됐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대의 역할과 의미를 다시 재구성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권김 위원은 “여대는 접근성과 형평성 측면에서 고등교육 체제의 다양성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제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대학에 입학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교육에 대한) 접근성이 개선된 상태”라며 “여대의 현재적 의미 재구성이라는 차원에서 이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어떤 것이 바꿔야 할 관행이고, 어떤 것이 지켜야 할 유산인지에 대한 정당성 재구성이 필요하다”며 “선교사와 사회지도층 등 설립자와 성취 중심의 역사가 아닌 민주주의와 다양성을 옹호하고 성차별에 저항해온 여성 고등교육 기관으로 상징 체계를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권김 위원은 또한 “이대는 한 명의 입학생으로부터 시작됐다.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이 설립했지만 한 명의 입학생이 여대를 만든 것”이라며 “그 한 명의 여대생을 만들어낸 것이 이대 역사의 시작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설립자 중심의 김활란 동상이 아닌 이화 시위의 역사와 학생 중심의 역사”라고 강조했다.
이대 초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 박사는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꼽힌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동안 학도병과 징용, 위안부 참여 등을 독려하고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2008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이대 학생들은 그의 친일행각을 이유로 교내에 설치된 김활란 동상의 철거를 요구해왔다.
이에 김활란 박사 등 논란 있는 과거 인물을 조명하는 것이 아닌 촛불 정국의 도화선이 된 2016년 시위 등 학생 중심의 의미 있는 사건을 더 강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2016년 ‘미래라이프대학’ 사업 신설 계획 철거 요구로 시작된 이대 시위는 정유라씨의 특혜입학 의혹과 맞물리며 일파만파 커져나갔으며, 재학생은 물론 졸업생과 교수 사회의 동참까지 이끌어냈다. 86일간의 본관 점거 농성 끝에 최경희 전 총장은 결국 사임했으며 민주적으로 평화롭게 진행된 이대 시위는 기존의 시위 문화를 바꿨다는 평가를 받았다.

나임윤경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역시 오늘날 여대가 존재의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단순히 안전하고 평등한 공간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인재로서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확신을 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나임 교수는 “저는 페미니스트지만 여자 교수회가 일반 교수회와 차별화되는 부분이 없다면 존재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여자 교수회가 래디컬(급진적) 하고, 대안적인 것들을 내놓지 않으면 있을 이유가 없다”며 “(여대에도) 여학생들로 하여금 남녀공학을 선망하지 않게 만드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이 학교에 입학하면 다른 사람과 달리 이 사회를 구원할 인재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믿음과 확신을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임 교수는 또한 한국의 여대도 미국의 ‘세븐 시스터즈’(Seven Sisters)처럼 연대를 통해 ‘경쟁 없이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세븐 시스터즈는 19~20세기 남성 대학에 버금가는 교육을 여성에게 제공하기 위해 설립된 여대 7곳을 가리킨다. 한 곳은 남녀공학으로 전환되고, 다른 한 곳은 하버드 대학과 통합돼 현재 5곳만이 여대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이 졸업한 웨즐리 대학이 대표적인 세븐 시스터즈 중 한 곳이다.
나임 교수는 “가령 이대는 여성학의 메카로, 다른 학교와 여성학 커리큘럼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대와 숙명여대를 중심으로 (여대 간) 연대는 불가능한 것인가. 경쟁하지 않고 경쟁력을 가질 수 없을까. 저는 분명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